민주주의의 미래

정치적 의사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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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022
박중현
에디터
에디터의 노트

이즘 스튜디오 민주주의 마지막 화를 맞아 앞으로 민주주의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앞으로의 민주주의엔 어떤 요소들이 어떻게 필요할까요?

관계🔁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는 함께합니다. 누구는 잘살고 누구는 못 사는 사회에서 갈등과 반목이 존재하지 않기란 어렵겠죠. 그렇기 때문에 불평등 문제가 완화되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질은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두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면 사회적 연대나 공적 가치는 소홀해집니다. 그런 사회에서 자유란 일부 가진 자와 힘센 자의 전유물이 되죠. 현재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은 어떻게 초래된 걸까요? 불평등을 세계적 현상으로 분석한 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21세기 자본>의 저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입니다. 그가 채택한 방식은 경제성장률과 자본수익률의 비교입니다. 경제성장률과 자본수익률의 차가 좁을수록 평등한 사회입니다. 경제활동으로 거두는 수익보다 물려받은 자산의 영향력이 크면 불평등은 심해지고 계층 간 이동성은 줄어들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류는 오래도록 불평등했습니다. 1700년대까지 인류의 경제 성장률은 0.1%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불리는 1940~80년대엔 평균 4%의 성장을 보입니다.

핵심 요인은 인구 증가입니다. 인구란 경제적으로 봤을 때 소비자이자 생산자입니다. 인구 증가와 생산성 향상이 동시에 이뤄지면 경제가 성장하고 불평등이 완화됩니다. 인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1980년대 이후 성장이 둔화되며 신자유주의가 들어서지만 사실 저 때가 이례적인 성장이었던 셈입니다. 계속해서 인구증가는 둔화될 테고 경제성장률도 2100년 기준 1.5% 수준으로 점쳐집니다. 그러나 ‘부동산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 자본수익률은 시대를 막론하고 4~5%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경제성장률이 ‘제로’에 가까웠던 전통 농경사회서도 토지 수익률은 5%에 달했습니다. 오늘날과 유사하죠.

1700~2100년(예상) 인구성장그래프. 푸른 부분은 인구, 보라색 선은 인구증가율을 나타낸다. 1950년 급증했다. ⓒMax Roser via wikimedia commons(BY-SA) (자료: Our World in Data)

내버려 두면 부는 증식되고 편중돼 불평등은 고착됩니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자본이 벌어들인 수익에 세금을 부과해 그 수익률을 떨어뜨리거나, 노동 소득을 늘려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것이죠. 전자의 예는 누진세, 후자의 예는 최저임금입니다. 이러한 소득 격차는 저절로 줄지 않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이죠.

바꿀 수 있는 건 정부 정책입니다. 그리고 정부 정책을 결정하는 건 다름 아닌 민주주의죠. 자본주의는 ‘1원 1표’의 판입니다. 돈 많은 이가 항상 승리합니다. 스타트 라인도 다르고 뛰는 환경도 다르고 보상의 규모도 다릅니다. 하지만 누구나 평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게임의 룰을 ‘1인 1표’로 바꿉니다. 가난과 불평등한 분배는 시장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자 곧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 우리나라 헌법 제119조 2항

전망👀

민주주의가 나아갈 길

그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지난 화에서 지적한 민주주의의 위기란 대표성과 공공성의 위기였습니다. 정치인, 정당,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낮은 신뢰도가 보여주듯 기존 민주주의가 시민의 뜻과 공공의 이익을 잘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데요. 그렇담 그들이 정치적 의사 결정을 독점하는 상태를 벗어나는 게 대안의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다양해져야 함을 뜻합니다.

시민의 뜻을 더 다양한 방법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층의 참여를 늘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총선은 선거법 개정으로 만 18세 54만8986명의 청소년이 투표권을 행사한 바 있죠. 기존 고령화 사회 속에서 잘 드러나기 힘들었던 젊은 목소리를 많이 확보하는 일도 민주주의의 신진대사에 도움이 됩니다.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이다.”  — 루소

시민이 더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적으로 성숙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루소의 말처럼 선거 때만 주인이 돼서야 올바른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으며 진정한 주인으로도 볼 수 없죠.

선거(election)는 본디 엘리트(elite)를 뽑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엘리트란 선출된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능력 있는 이에게 정치를 맡긴다는 공화제적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대의제 시스템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투표는 민주적으로 시민의 뜻을 말하고 또 들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선택받지 못하는 후보와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는 항상 존재합니다. 그렇담 이들의 의견은 묵살되는 걸까요?

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다른 방식도 있어야 맞습니다. 슬로건일 뿐이긴 하지만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거나 정권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느낀다는 건 분명 민주주의 관점에선 문제 있는 사회입니다. 민의가 특정 진영이나 이념에 따라 선택적으로 반영된다는 거니까요.

정치적 성숙은 인간사회 발달에 따라 맞이하는 단계적 소양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는 매슬로 욕구 이론을 들어 안전이나 신체적 생존에 걱정하지 않게 됨에 따라 환경, 기아, 민족이나 종교 및 소수자 문제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배타성을 거두고 적극 논의하게 됐다고 말하죠. 이는 앞으로의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와 자유엔 평등한 기본적 삶의 보장이 전제조건으로 기능함을 드러냅니다.

키워드🗝

새로운 민주주의

대안적 의미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거론되는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시민의 참여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그간 반영되지 못했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게 특징이자 목적입니다.

전자민주주의

처음에는 시민의 참여 확대에 그 논의가 한정됐으나, 다양한 기술 활용을 통해 정치적 의사결정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강화하는 장치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자정부, 전자정당, 전자 거버넌스 등이 실험되고 있는데요.

오늘날 디지털 네이티브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민이 그 주체입니다. 자라면서 이미 정보통신기술 활용이 능숙해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정치적 데이터를 소비하고 또 공급하죠.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젊은 세대의 정치참여 역시 전자민주주의의 단면입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활발히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 참여 효과가 증대됩니다.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권도 확대된다고 볼 수 있죠. 비판도 있습니다. 참여는 늘지만 책임과 심의성은 낮아진다는 지적입니다.

책임 없는 참여나 심의 없는 참여입니다. 가짜뉴스를 퍼뜨리거나 각자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반향실 효과(echo chamber)로 정치적 부족주의를 낳을 우려도 있습니다. 또한 권위주의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면 정보 감시나 통제, 조작 등 ‘빅브라더’가 출현할 수도 있죠. 디지털 권위주의는 이미 중국이 잘 보여주고 있는 예입니다.

정보정치학자 채드윅은 낙관이나 비관에만 머물러 다투기보다 아예 새로운 전자민주주의를 디자인하자고 제안합니다.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완할 기술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시민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 디지털 아고라를 구축하자는 거죠. 해외 협업 의사결정 플랫폼 루미오(Loomio)나 블록체인 기반 투표 기술인 아고라(Agora)가 재미난 예입니다. 루미오는 디지털 기술로 강화된 토론 및 심의가 가능하고, 아고라는 단순다수제를 벗어나 다중투표, 선호반영, 위임옵션 설정 등 다양한  투표 설계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죠.

숙의민주주의

‘숙의’(熟義)는 ‘깊이 생각하여 넉넉히 의논함’을 뜻합니다. 숙의민주주의란 이러한 ‘숙의’를 의사결정의 중심으로 삼는 직접민주주의적 형태로서 다수결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합니다. 첨예한 갈등이 존재하는 사안에 대해 단순히 찬반으로 의견을 대립하는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학습 및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이해와 공감으로 해결책을 도출해낸다는 장점이 있죠.

개념은 1980년에 탄생했습니다. 당시 미국 의회 의원들의 업무를 규정하기 위해 조지프 베세트 교수가 제안한 표현인데요. 오늘날 투표나 여론조사처럼 선호를 간단히 추려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에 반대하고 열린 토론을 바탕으로 공공문제를 해결하고자 대두했습니다.

이는 정확하게 표현 또는 반영되지 않는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학습 및 토론을 갖기에 정보 습득이나 의사교환, 숙고의 시간과 기회가 없는 상태에서 내리는 여론의 신뢰성 문제에도 기여하죠. 핵심은 국민 중에서 대표집단을 뽑아 일정 기간 교육 및 토론 시간을 주면서 공론화를 거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 2017년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당시 공론화입니다.

숙의 민주주의 역시 거론되는 한계는 있습니다. 참여하는 집단의 대표성 문제라든지, 높은 비용 발생 문제라든지, 의견 신뢰성 문제 등입니다. 전문적 결정을 시민의 손에 맡기는 한계나 숙의 결과를 반영해 집행한 정책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기 어렵다는 비판도 지적됩니다. 그러나 시민이 스스로 정치적 의사에 참여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구할 만한 대안으로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 마치 민주주의가 수단이자 목적이고, 체제이자 가치인 것처럼요.

참고한 자료

뉴스

문화일보

“대의 민주주의 위기… 유사성향 소수정치집단이 의사결정 독점않게 해야”

도서

<게임 오버>, 한스 페터 마르틴 지음, 이지윤 옮김, 한빛비즈, 2020.

<사라진 민주주의를 찾아라>, 장성익·방상호 지음, 풀빛, 2018.

<위험한 민주주의>, 야스차 뭉크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18.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EBS 다큐프라임 민주주의 제작팀·유규오 지음, 후마니타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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