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고려의 통치 체제 정비
1️. 고려의 후삼국 통일
- 918년 : 고려 건국(왕건은 고구려 계승의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하고,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함)
- 935년 :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 → 신라 경순왕의 항복
- 936년 : 왕위 계승 문제에 따라 내분이 발생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
- 통일 이후 : 후삼국과 발해의 유민을 수용해 민족의 재통합 달성
2️. 호족 통합과 북진 정책 추진
- 태조는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기 위해 호족을 통합하고 민생의 안정을 위한 정책 추진
- 대내 정책 : 호족 우대 정책(유력 호족 가문과 혼인, 성씨 하사), 사심관과 기인제도(호족 통제 및 지방 통치 보완 의도), 흑창 설치(빈민 구제 기관), 훈요 10조(후대 왕에게 남긴 교훈)
- 대외 정책 : 북진 정책 추진(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중시), 거란 적대시
3️. 왕권의 강화
- 태조 사후 왕위 계승을 두고 외척 사이의 치열한 다툼 전개
- 불안정한 상황에서 광종이 즉위한 후 왕권 강화 정책 추진
- 광종의 정책 : 노비 안검법 시행(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 → 양인의 수 증가로 국가 재정 확충), 과거제 실시, 공복 제정, 호족 숙청, 황제 칭호와 ‘광덕’, ‘준풍’ 등과 같은 독자적 연호 사용, 개경을 ‘황도’라 명칭
4.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교
- 성종 :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해 유교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과 지방 통치 체제 정비
- 중앙 통치 기구 : 2성 6부
- 지방 : 12목 설치 & 지방관 파견
- 유학 교육 장려 : 중앙의 국자감 정비, 지방에 경학박사 파견
5️. 통치 체제의 정비
- 중앙 :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6부 중심, 대간(왕과 관리의 잘못 지적, 관리 임명 및 해임에 대해 동의), 도병마사 식목도감(고려의 독자적 정치 기구)
- 지방 : 성종(12목 설치 및 지방관 파견, 호족을 향리로) → 현종(전국을 5도 양계로 구분하고, 그 밑에 군현과 진 설치)
6️. 고려, 송, 거란 사이의 세력 균형
- 10세기 동아시아에 고려, 송, 거란 등을 중심으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다원적 국제 질서 형성
- 거란의 침략과 극복 : 거란은 송을 공격하기 전 송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는 고려를 공격
- 거란의 1차 침입 : 서희는 거란과의 담판을 통해 송과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약속 , 강동 6주 확보
- 거란의 2차 침입 : 고려가 송과의 교류를 유지하고 거란과는 적극적으로 친선관계를 맺지 않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재침입 → 개경이 함락되기도 하였으나 고을의 자체적 방어 및 중앙군 정비로 물리침
- 거란의 3차 침입 : 거란이 다시 침입하였으나, 강감찬이 귀주에거 거란군을 크게 격파(귀주대첩)
- 이후 고려, 송, 거란 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안정
7️. 여진과의 관계 변화
- 12세기, 여진이 부족을 통합함에 따라 고려와 충돌 발생
-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기병 중심의 특수 부대)을 편성하고, 여진을 공격하여 동북 9성을 쌓음 → 그러나 여진의 계속된 공격으로 방어가 어려워지자, 여진에게 충성을 약속 받고 동북 9성을 되돌려줌
- 여진은 세력을 키워 금 건국, 고려에 형제 관계 요구 → 고려 거부 → 금이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 요구 → 고려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