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 정책의 추진
1️. 개화파의 형성
- 통상 개화론의 대두 : 서양의 우수한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할 것을 주장(18세기 북학파의 문제 인식을 계승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을 중심으로 제기)
- 개화파의 형성 : 통상 개화론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이 개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 → 중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서양 제도와 과학 기술의 수용을 통한 부국강병 주장
2️. 개화 정책의 추진
- 수신사 파견 :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과 세계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수신사 파견(제1차 수신사), 약 4년 후 김홍집을 중심으로 다시 일본에 수신사 파견(제2차 수신사)
- 통리기무아문 설치 : 개화 업무 총괄 기구 (통리기무아문 아래 12사를 두어 사무 업무 관장)
- 별기군 창설 : 국방력 강화를 위해 근대식 군대 양성(기존 5군영은 2영으로 축소)
- 조사 시찰단 파견 : 각 부의 사무, 군사 세관 업부 등에 관해 조사
- 영선사 파견 : 청에 파견해 근대 무기 제조 기술 및 군사 훈련법을 익혀 오도록 함
3. 개화파의 분열
-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과의 관계 설정, 개화의 속도와 방법 등에 대한 개화파 내 입장 차이 발생 →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로 분열
- 급진 개화파 : 청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서양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 제도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김옥균, 박영효 중심,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입장)
- 온건 개화파 : 청의 내정 간섭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개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김홍집, 김윤식 중심, 청의 ‘양무 운동’과 같은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