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한 반발
1️. 유생 중심의 위정척사 운동
- 위정 척사 운동 : 천주교의 확산과 서구 열강의 통상 수교 요구 등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을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
- 1860년대 : 척화주전론 주장(이항로, 기정진 등을 중심으로 열강의 통상 요구에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주장)
- 1870년대 : 왜양일체론 주장(일본과 서양이 같다고 보고, 일본의 개항 요구에 반대)
- 1880년대 : 이만손 중심의 영남 유생들이 개화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적극적으로 반대(만인소) → 정부가 홍재학 상소를 계기로 위정척사 운동 탄압 → 위정척사 운동 약화
- 위정척사 운동의 정신은 1890년대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
2️. 임오군란의 발생
- 계기 : 5군영에서 2영으로 축소되면서 구식 군인들이 일자리 상실,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 구식 군인들에게 13개월 만에 급료로 지급된 쌀에 모래와 겨가 대거 포함
- 전개 : 구식 군인을 중심으로 고관의 집 습격,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살해, 일본 공사관 공격, 궁궐까지 습격해 고관 살해 등(임오군란)
- 고종의 대처 : 사태 수습을 위해 흥선 대원군에게 정권 이항(흥선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 폐지, 5군영 부활 등 개화 정책 중단)
3️. 임오군란의 진압과 청의 내정 간섭
- 민씨 일파의 요청으로 청이 군대를 파견해 흥선 대원군 납치 & 임오군란 진압
- 청의 내정 간섭 :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묄렌도르프와 마젠창을 고문으로 파견,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맺어 청 상인의 이권 허용
- 제물포 조약 체결 :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인의 피해를 구실로 삼아 제물포 조약 체결(배상금 지불,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