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좌우 합작 운동
1. 좌우 합작 운동 배경
- 제 1차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 & 이승만 중심 단독 정부 수립 움직임 -> 분단 위기 고조
- 좌우 합작 위원회 :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파의 노력 -> 통일 정부 수립 운동 전개 -> 미군정의 좌우 합작 위원회 지원
2. 좌우 합작 7원칙
- 좌우 의견을 절충 -> 좌우 합작 7원칙 발표
- 내용 :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리 등에 대한 내용
-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은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구성함
-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 김구, 이승만 등의 우익 세력과 박헌영 등의 좌익 세력 모두 불참
3.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한 좌우 의견 갈등
- 토지 개혁 : 우익 세력은 7원칙에 담긴 토지 개혁 방식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 /반면 좌익 세력은 유상 매입의 토지 개혁안이 지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 비판
- 반탁 입장 : 7원칙 내에 반탁의 입장이 빠진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 상당
- 단독 정부 수립 : 일부는 단독 정부 수립을 원함
- 친일파 처단 의지 :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은 좌우 합작 7원칙 안에 친일파 처단ㅇ ㅢ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
4. 좌우 합작 운동의 불발
- 좌우간의 의견이 조율 되지 않은채 지지부진하게 운영 & 냉전 체제의 본격화 -> 미군정의 좌우 합작 운동 지원 철회 -> 여운형의 암살 -> 좌우 합작 운동 중단
- 김규식 등의 인물들이 좌우 합작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감
한반도 문제를 의논한 유엔
1. 1947년 5월, 제 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 협의에 참여할 단체를 정하는 과정에서 의견 충돌 -> 성과 없이 종료
- 미국 :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이전
- 소련 :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서 논의하자 소련은 이를 두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 -> 소련의 유엔 총외 불참
2. 유엔 총회의 결정
- 인구 비례에 따라 남북한 총선거로 정부를 세울 것으로 결의
- 다음해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총선거 실시 감독을 위해 한반도 방문
- 소련의 유엔 임시 위원단의 38도선 이북 침입 거부 -> 유엔 소총회 개최
- 유엔 소총회의 결정 : 선거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 선거를 치를 것을 결의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 시도
1. 남북 협상
- 분단의 가능성 증가
- 이에 1948년 2월,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에게 남북 정치 요인 회담 제의
- 1948년 4월 : 김구와 김규식이 38도선을 넘어 평양에서 북한 지도부와 남북 협상을 가짐
- 남북 협상의 결과 :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 발표 -> 하지만 미국과 소련 모두 이 협의안을 무시 -> 북한 역시 독자적인 정권 수립 준비 -> 유엔의 단독 선거 주장 -> 분단을 막지 못함
제주 4.3 사건의 발생
1. 1947년 3월 1일 제주
- 삼일절 기념 행사 이후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 전개
- 시위 당일 경찰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 -> 다수의 사상자 발생
- 사건의 수습 과정에서 미군정 : 다수의 제주도민 탄압
2. 1948년 4.3 사건
- 미군정에 대한 반감이 높아진 상황
- 제주도 좌익 세력의 무장봉기 : 단독 선거 저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움
- 미군정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 -> 수많은 제주도민 사망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 이승만 정부 : 여수에 주둔한 군부대의 일부를 제주도로 보내고자 함 -> 부대 내 제주도 진압을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무장 봉기 발생
- 여수·순천 10.19 사건 : 여수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한 이들에 의해 여수와 순천 지역이 점령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