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전쟁 기운이 감돈 한반도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 미국과 소련 한반도에서 군대 철수
- 북한 : 소련과 중국으로 부터 군사 지원 & 남침을 위한 소련의 승인을 얻음
- 미국의 애치슨 선언 : 남한과 타이완을 배제하는 극동 방위선 구축 -> 북한은 한반도 전쟁이 발생 하여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
1. 북한의 기습 남침
- 1950년 6월 25일 새벽 : 전면적인 남침 시행 -> 3일만에 서울 차지 -> 빠른 속도로 낙동강 일대로 진격
-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 북한국을 침략국으로 지정 -> 유엔군 파병 결정 -> 미국을 포함한 16개국 참전
2.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남한에 유리해진 전세
- 인천 상륙 작전 시행 :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위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전세를 역전하고 서울을 수복함
- 남한의 북한 진격 : 인천 상륙 작전 이후,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함
3. 중공군의 개입
-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은 중국에 참전을 요청 ->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한강이남으로 남한의 전선 후퇴(1.4 후퇴)
-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남한을 다시 수복함
- 하지만 전쟁은 38도선 인근에서 교착 상태에 놓이게 됨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1. 정전협정
- 38도선 인근 교착 상태의 장기화 -> 소련의 선 정전 협정 제안 -> 미국의 승낙 -> 2년간 정전협정 지속
- 2년간 정전 협정이 지속됐던 이유 : 군사 분계선의 설정, 포로 송환 방식에 대한 논의
2. 2년의 정전 협정의 기간
- 38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 지속 -> 다수의 희생자 발생
- 이승만 정부 : 정전 협정에 반대하여 북한 포로 송환을 거부하고,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 시킴
3.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 합의 : 중립국 감독 위원회, 비무장 지대 설치 합의
- 이승만 정부의 태도 변화 : 정전협정 진행 초기 강력한 휴전 반대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경제 원조를 약속을 얻어냄 -> 정전 협정 준수의 입장으로 변화
전쟁 피해 입은 남한과 북한
- 6.25 전쟁 : 한반도 전 지역에 걸쳐 전개된 대규모의 국제 전쟁
1. 인명 손실과 가족의 붕괴
- 다수의 민간인과, 군인 희생
- 다수의 이산가족, 전쟁 고아 발생
2. 극심한 경제적 타격
- 농촌 황폐화 -> 식량 생산 급감
- 공장 등 산업 시설과 사회 기반 시설 파괴 -> 물자 공급 부족
3. 민족 동질감의 약화
- 전쟁으로 인해 민족 동질감 약화
- 남북 사이 적대감 고조 -> 분단 상황의 고착화
- 남북 정부의 무력 통일 주장 & 대립
- 월남자 월북자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차별
4. 분단 상황의 독재 정치 강화 수단화
- 이승만 정부 : 반공을 강화 -> 국민 자유 억압 -> 독재 체제 수립
- 김일성 :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정적 숙청 -> 유일 체제 확립
생활에 나타난 변화
- 전쟁 이후 인구 상당수가 도시로 이주
- 주택난과 교통난이 심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거주 환경에서 지내야 했음
-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가족 중심 가족 공동체 개념 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