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갑신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서구식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은 외교정책으로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유지했어요. 이후 고종의 친정(직접 정치를 함)이 시작되면서 청나라, 일본, 미국 등의 여러 나라와의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과 관계에 대해 크게 2가지 입장으로 나뉘었어요. 흥선대원군처럼 서양과의 교류를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자는 위정척사파와 서양의 법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개화파로 나뉘었습니다.
개화파 중에서도 청나라를 본받아 근본은 조선의 전통으로 하고, 기술만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일본을 본받아 나라의 법, 제도, 기술 모두 서양의 것으로 바꾸자는 급진 개화파가 있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나라가 조선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면서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갈등이 커졌어요. 온건 개화파의 편에는 고종의 왕후인 민씨 정권이 있었고, 급진 개화파에는 김옥균, 박영효가 있었어요.
1884년 베트남을 두고 청나라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면서 임오군란 이후에 조선에 있던 청나라의 군사가 일부 철수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회로 일본은 청나라와 민씨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급진 개화파에게 일본 군대와 돈을 지원하기로 약속합니다.
일본의 약속을 받은 급진 개화파는 1884년 10월 17일 우정총국(우체국) 개설을 축하하는 피로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어요. 이를 갑신년에 일어난 정변이라는 뜻에서 ‘갑신정변’이라 합니다.
급진 개화파는 피로연에서 불을 지르며 민씨 세력의 일부를 처단하고, 고종에게 청나라의 군대가 침입했다고 속여 일본군을 불러들이도록 했어요.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80여 개조의 정강을 발표했어요. 청에 대한 사대 외교 폐지, 헌법과 의회를 세우는 입헌 군주제 도입, 재정 기관의 일원화, 자유로운 상업 발전 등을 담고 있었죠.
하지만 개혁을 발표한 19일 오후 청군이 공격해왔고, 일본군은 철수합니다. 결국 급진 개화파인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며 갑신정변은 3일 만에 끝나게 됩니다.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정변이 끝났다는 의미의 삼일천하로 유명한 사건이에요.
조선의 대다수인 상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하지만 입헌 군주제와 같은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