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을 손에 쥔 사회의 과제

살아남느라 지나친 코로나19 보건 비하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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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2021
박중현
에디터
에디터의 노트

밤이 깊어도 새벽은 오나 봅니다. 끝을 알 수 없던 코로나 팬데믹에도 백신 접종이 시작된 걸 보면요. 하지만 '이제 다 끝났다'라는 안도는 조금 이릅니다. 여전히 접종을 기다리는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요. 시간 문제 아니냐고요? 글쎄요. 과학에게서 백신이라는 바통을 이어받은 사회의 과제는 이제 막 걸음을 뗐을 뿐입니다.

팬데믹을 끝내는 것은 백신이 아니다

코로나19를 종식시키는 것은 백신 자체가 아니다. 사회 전반에 면역 체계를 형성할 대규모 예방접종, '백시네이션'(Vaccination)이다. 백신이 나와도 이를 충분한 인구에게 접종하지 않으면 종식을 기대하긴 힘들다. 올바른 접종을 통해 집단면역 형성에 성공한 이후라야 포스트코로나의 문고리를 제대로 잡을 수 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현재 코로나 팬데믹에서 과학의 몫은 끝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른 것은 사회의 역량이다. 그렇다면 백신 접종을 위해 사회에 필요한 고민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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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맞아야 할까?

우리나라 백신접종 계획 및 순서. CDC 및 주요 선진국 백신 배포 권고사항처럼 감염취약시설 및 고령층, 의료기관 종사자가 우선 접종 대상이다. (자료: 질병관리청)

백신을 손에 넣은 뒤 가장 먼저 들 고민은 단연 '이걸 누구 먼저 맞히지?'일 테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사망률을 낮추고 감염병 전파 방지 및 사회 유지에 크게 기여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 접종할 것을 권고한다. 이에 따라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고위험 의료기관 환자나 고령층을 함께 고려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와 직접 맞닥뜨려 감염 노출 위험이 높은 의료진에 면역을 부여해 사회 기능 및 안정을 유지하고, 코로나19 감염에 취약한 고령층을 접종해 사망률을 낮추기 위함이다. 요양병원·노인의료복지시설과 같은 고위험의료기관에 대한 접종 역시 중증환자의 이용이 많은 점을 고려해 피해 확산 및 사망 예방을 고려한 우선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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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다 맞을 수 없다면

현재 접종을 시행하거나 앞둔 국가 다수가 따르고 있는 이 방침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다행인 경우다. 접종에 대해 이 방침을 따를 수 있다면 안정된 사회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신 물량이 충분히 확보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순차적으로 다 맞긴 할 것이므로, 위험군과 의료·방역 인력에 먼저 순서가 돌아가는 데 큰 위험부담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백신을 다 맞히는 것만큼 접종 기간 내 벌어질 수 있는 감염 확산이나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는 데도 신경 쓴 계획이다.

그러나 백신 물량이 부족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약 서사물이라면 장르가 변한다. 전자가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휴먼 다큐멘터리였다면, 이제는 백신을 두고 온갖 이해관계와 감정이 충돌하는 서스펜스 스릴러가 된다.

1994년 미국 보건학 교수 윌리엄 키식이 도서 <의료의 딜레마: 무한한 요구 대 유한한 자원>에서 소개한 개념인 '보건의료의 철의 삼각'. 유한한 의료 자원 속에서 세 가치의 우선순위는 동일하기에 적정 수준의 선택이 필요하다.

의료 서비스는 자원이 한정돼 있다. 어느 선진국이라고 해서 모든 환자를 제때 치료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어떤 환자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할 때, 반대편에선 어떤 선택받지 못한 환자가 생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큼 어느 수준으로 제공할지 따져서 원칙을 세워야 한다. 백신도 마찬가지다. 백신을 다 놓을 수 없다면 선택은 불가피하다. 선택이 불가피하다면 합리적이어야 하고, 최소한 정의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백신 접종을 위해 팔을 걷는 이도 바늘을 들이미는 이도 떳떳할 수 있다. 지금 이 접종으로 인해 맞지 못 하게 될 다른 누군갈 떠올리더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논의와 원칙이 필요해진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문제가 이토록 골이 아파져서일까, 생존을 가르는 영역임에도 실마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백신 접종이 어떤 대상이 입는 선택적 수혜의 의미를 지니는 상황이라면, 그 효용을 두고 가장 대표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공리주의와 <정의론>이다. 제레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의 목표는 익히 알고 있듯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이를 백신 접종 문제에 적용하면 두 가지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한정된 백신 수량 안에서 최대한 많은 이를 접종할 수 있도록 양과 질을 조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백신 접종으로써 얻는 기대 수명을 효용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잡는 것이다. 이 경우 백신은 상대적으로 살날이 적은 노인보다 어린이에게 우선적으로 접종된다. 같은 한 사람이라도 백신 접종으로 효용을 얻는 세월이 많기 때문이다.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의 견해를 따르면 이와 거의 정반대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사상적으로도 공리주의의 이익추구 방식이 편향됐으며 공평하지 않다고 비판했던 철학자다. 롤스의 분배적 정의 사상을 핵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무지의 베일'이다. 무지의 베일은 사회 구성원이 분배 방식을 논의함에 있어 가장 공평하고 정의로운 선택을 내릴 거로 생각하는 일종의 상태를 가리킨다. 분배를 논의하거나 주장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상태나 위치, 배경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롤스는 이것이 분배의 형평성과 공정함을 해친다고 보았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신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지의 베일'에 싸여 있는 상태라면 어떤 이에게 특별히 유리하거나 불리하지 않도록 조화로운 분배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누구든 장애인이나 노인,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기에 최소수혜자에게 최대혜택이 돌아가는 원칙을 내세우게 된다. 이에 따라 백신을 접종할 경우 감염에 취약한 노인 또는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취약계층이 우선 대상이 된다. 범주를 세계로 확장할 경우, 의료 시설이나 보건 체계 등이 열악해 코로나 팬데믹에 취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분배와 원조의 논리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자유주의 사회철학자 로버트 노직의 '운 평등주의'는 이 안에서도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롤스처럼 최소수혜자에 대한 고려는 필요하다고 여기지만 그 최소수혜자가 된 상황, 즉 '운'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태어나면서부터 취약계층에 놓이거나 개발도상국으로서 어쩔 수 없이 열악한 상황을 맞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맹목적 운'이지만, 경우에 따라 차등을 고려할 만한 '선택적 운'도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코로나19 백신 접종이나 치료 상황에 적용해 보면 같은 환자라 할지라도 정말 불가피하게 감염된 경우와 방역 수칙을 따르지 않고 사회에 혼란을 초래한 경우를 동일선상에 두는 게 평등하냐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방역에 협조하고 수칙을 준수했는지 여부도 접종의 순서를 정하거나 형평성을 이야기하는 데 원칙이 될 수 있다.

'원칙'으로 어찌하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들

이러한 사상들이 백신 접종에 있어 중요한 원칙이 되어주긴 하지만, 각 국가나 사회가 겪고 있는 이해관계에 앞서 존재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백신을 손에 쥐기 이전에도 사회가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는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둘러싼 지식재산권 문제다. 현재 백신에 대한 권리는 이를 개발하는 다국적 제약사 또는 바이오 기업이 지식재산권 형태로 소유하고 있다. 이는 특히 개발도상국의 접종을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일종의 공공재 역할을 해야 할 백신이 사유재산 형태로 거래되고 보장받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소득 국가에서 백신을 손에 넣기 어려운 것은 물론, 생산 능력을 갖춘 개발도상국이라 할지라도 신속하게 지식을 공유받아 생산에 나서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에 제약사 측은 지식재산권 보장이 신속한 백신 개발의 핵심임을 지적한다. 이에 2020년 5월 WHO 회원국의 의사결정 기구 세계보건총회(WHA)는 코로나19 대응에 지식재산권 장벽을 없애자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지만, 제약업계 측의 반발로 합의는 이루지 못한 바 있다.

백신을 확보하더라도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는 사회마다 다르다. 세계 각국의 접종 기준은 대체로 위에서 밝힌 미국 CDC 권고와 비슷하지만 나라마다 질병 확산 정도, 사망률, 인구 구성, 사회·경제적 영향 등을 고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 예로 인도네시아는 청장년층에게 먼저 백신을 접종한다. 이는 코로나19 확진자의 80%가 노동자 계층에서 발생한 이유도 있지만, 노동 인력에 먼저 백신을 접종해 경제 전선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노동자 대부분이 재택근무하기 어렵다는 점도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는 백신 접종 논의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겪고 있다. 그간 잦은 전염성 발생에 따른 대처 노하우와 신속한 국경 봉쇄 등으로 선방해왔던 아프리카는 신종 변이 바이러스 감염으로 현재 어찌할 수 없는 보건 인프라 문제가 불거졌다. 앞서 언급한 백신 지재권 문제에 더불어 부족한 국가 예산 때문에 백신 공급에 기약이 없는 상태다. 인도네시아가 백신 접종에 나름대로 전략을 발휘한 경우라면 아프리카는 백신이 있어도 접종이 어렵다. 유통을 위한 콜드체인(저온유통체계) 구축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보건 시스템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아프리카의 코로나 팬데믹을 가중하고 있는 것은 부족한 의료 시설과 의료진 등의 공공의료 문제다.

💡 다음은 팬데믹이 인류 역사에서 바꾼 것과 코로나19가 일깨운 공공의료의 현주소를 다룬 '팬데믹의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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