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가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죠. 외계인에게 한 가지 테마로 오늘날 인간사회를 설명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 코로나19로 팬데믹이 잠식한 현대를 얘기할 수도 있고, 플라스틱과 닭뼈를 들어 인간이 지구시스템에 끼치는 영향을 인류세로 설명할 수도 있겠죠. 어느새 삶 곳곳을 꿰차고 있는 AI를 소개하며 포스트휴먼의 세계를 그려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간단한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휴대폰을 꺼내 유튜브를 켜는 겁니다. "야, 이게 지금 인간사회야."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붉은 상자 유튜브, 과연 어떻게 출현했을까요?
유튜브의 창립자는 3명입니다. 온라인 결제 서비스로 유명한 페이팔(PayPal)의 초기 멤버이자 직장동료였죠.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채드 헐리,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스티브 첸과 자웨드 카림이 그들입니다. 페이팔 출신 벤처기업가, 소위 '페이팔 마피아'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창업을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페이팔에 만족하며 근무했고 성과도 좋았습니다. 서로 호흡도 잘 맞았죠. 이는 페이팔의 개방적이면서 상호소통이 긴밀한 업무문화와도 맞물렸습니다. 엔지니어와 웹디자이너의 업무 핑퐁이 긍정적으로 활발히 오갔던 셈인데요. 스티브와 자웨드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채드는 이를 반영해 화면을 설계하고, 다시 의논하며 페이팔의 많은 기능을 척척 손봐 나갔습니다.
이에 힘입어 2002년 페이팔은 창업 3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하게 됩니다. 스티브 역시 200만달러가 넘는 연봉 대우를 받게 되죠. 그런데 이때 페이팔의 성장을 눈여겨 본 이베이(eBay)가 페이팔을 인수하고, 스티브는 이베이의 매니저가 됩니다. 그러나 스티브는 오히려 고민이 많아집니다. 자유로이 아이디어가 오가고 업무에 반영되던 페이팔과 달리 이베이의 경영은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에 가까웠기 때문이죠. 페이팔의 창업과 경영방식을 인상 깊게 여겼던 스티브와 채드는 자웨드와 함께 독자적인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동영상 플랫폼 사이트로 자리 잡은 유튜브가 태어난 계기는 다소 엉뚱합니다. 2004년 2월 열린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 '슈퍼볼'과 관련 있죠. 정확히는 경기의 하프타임 쇼에서 펼쳐진 한 공연입니다.
혹시 '자넷 잭슨'이라는 가수를 아시나요?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이자 잭슨 패밀리의 막내로 '댄스 디바'의 개념을 만들어 낸 미국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사람입니다. 당시 무대에 선 것이 그녀인데, 공연 도중 그만 가슴이 노출되는 사고가 일어납니다. 이 사고는 당시 큰 화제가 돼 '문제의' 영상을 구하고 싶지만 구할 수 없어 안타까워 하는 대중의 모습이 현상으로 포착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들 중 유튜브 공동창립자 중 한 사람인 자웨드 카림도 껴 있었죠.
그런데 해프닝도 시각에 따라 혁신의 트리거가 되는 걸까요. 자웨드는 뒤늦게 영상의 클립이라도 구하고 싶었지만 얻은 것은 글, 사진, 오디오에 비해 훨씬 어려운 동영상 공유에 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스티브와 채드 역시 공감하는 바였죠. 스티브는 평소 캠코더로 영상을 기록하기 좋아했으며, 마침 자신의 아파트에서 찍었던 저녁 파티 비디오를 전송하는 데 용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던 겁니다.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하던 그들의 시선은 동영상 공유 플랫폼이라는 불모의 비즈니스 모델로 향합니다. 누구나 쉽게 동영상을 올리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사이트를 만들어보자는 거였죠. 그들이 합의한 3가지 원칙은 이랬습니다.
누구나 동영상에 관심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세 사람은 2005년 2월14일 유튜브닷컴(youtube.com) 도메인을 사들이며 유튜브를 창업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당시 세상에 내놓은 유튜브의 초기 모습은 지금 같은 서비스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당시 유튜브가 구현하려 했던 모습은 동영상 버전의 '핫오어낫'(Hot Or Not)이었습니다. 핫오어낫은 쉽게 말해 오늘날 이성 매칭 서비스 내지 데이팅 어플과 가까운데요. 유저들이 사이트에 사진을 올리면 이를 본 또 다른 사용자가 '핫한지 그렇지 않은지' 평가해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죠.
"Tune In, Hook Up". 당시 유튜브 로고에 따라붙은 태그라인(Tagline)입니다. 전파가 맞으면 연결하라는 소리죠. 유튜브가 문을 연 2월14일 역시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이성 매칭 서비스임을 어필하기 위한 전략이었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폭망'합니다. 사이트의 이용자가 스티브와 채드, 자웨드 세 사람뿐인 날이 대부분이었죠. 급기야 여성 고객이 영상을 올리면 20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유인책까지 내놓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쓰디쓴 실패의 맛을 본 유튜브 창립자들은 '오답노트'를 작성합니다.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뭘 하려 했던 건지 돌아봤습니다. 그리고 키를 돌립니다. 어떤 영상이든 유저가 원하는 대로 올릴 수 있는 동영상 플랫폼, 바로 맨 처음 그들이 바란 서비스이자 현재의 유튜브 콘셉트로 말이죠.
같은 해 4월23일, 마침내 첫 유튜브 영상이 업로드됩니다. 자웨드 카림이 올린 '미앳더주(me at the zoo)'라는 영상입니다. 이 19초짜리 영상엔 정말 별 게 없습니다. 제목처럼 동물원에 방문한 자웨드가 뒤편의 코끼리들을 힐끗 바라보며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지금 코끼리들 앞에 서 있는데요, 얘들의 멋진 점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긴 코를 가졌다는 겁니다. 할 말은 그게 다인 것 같군요.
16년이 지난 지금 이 영상의 조회수는 1억6000만회가 넘습니다. 유튜브의 포문을 열었다는 역사적인 의미 때문에 '성지'처럼 여겨지는 것이지만, '정말 누구나 아무거나 올릴 수 있다'는 유튜브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해석도 있죠.
자웨드가 코끼리의 멋진 점을 영상으로 설파한 얼마 뒤인 5월, 유튜브는 대중을 상대로 한 퍼블릭 베타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선하고 대단한 서비스라 해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이용자가 급증할 순 없죠. 그런 유튜브를 대중에 소개한 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대중 자신입니다. 물론 칼자루는 유튜브가 쥐여주죠.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한 공유 기능, 영상을 누구나 퍼 나르고 또 볼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이는 유튜브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공유도 공유지만 영상을 퍼 나르면 유튜브 로고와 링크 주소가 따라가 남기에 자체로 훌륭한 광고이자 홍보가 됐던 셈이죠. 유튜브가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05년 9월, 최초로 100만뷰 영상까지 등장하죠.
그 주인공은 바로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지뉴가 찍은 나이키 광고 '터치오브골드(touch of gold)' 영상입니다. (화제의 장면을 빨리 보고 싶으신 분은 1분30초부터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기억나실 분 계실 텐데요, 호나우지뉴가 골대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나온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차는 영상입니다. 당시 진짜냐, 가짜냐, 합성이냐, 호나우지뉴는 역시 외계인이냐 하는 각종 논란과 함께 급속도로 공유됐죠. 유튜브 역시 업계 눈도장을 한껏 받았음은 두말할 나위 없고요.
그런 유튜브에 가장 먼저 투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실리콘밸리 대표 벤처캐피탈인 '세쿼이아 캐피탈'입니다. 유튜브 투자를 주도한 인물은 로엘로프 보다인데, 그는 과거 페이팔 상장과 이베이 매각을 추진한 페이팔 최고재무이사(CFO)출신입니다. 페이팔에서도 '페이팔 마피아'들의 행보를 눈여겨보고 있던 겁니다. 유튜브는 세쿼이아 캐피탈로부터 총 1150만달러라는 초기 서비스로는 이례적인 거액을 투자받습니다. 그 덕분에 유튜브는 채드의 차고에서 벗어나 정식 사무실을 차립니다. 직원도 늘리고 서버 비용도 충당하며 공식 출시를 이루죠. 2005년 11월의 일입니다.
하지만 진짜 '헬게이트'는 이때부터 열립니다. 유튜브에 불황이 찾아왔냐고요? 사람들 발길이 끊겼냐고요? 아닙니다. 이후로도 성공가도를 달렸습니다. 너무 달려서 문제였죠. 2006년 7월 기준 하루 업로드되는 영상은 6만5000개에 달했고, 조회수는 1억건을 돌파합니다. 그래서 문제였습니다. 당시 직원은 30명 남짓이었는데 유럽, 아시아 등으로 해외 진출하지 모바일 서비스 시작하지 업무 과부하가 너무 심했던 겁니다. 모든 직원이 1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했다고 하니, 주말 없이 하루 14시간 넘게 일한 셈입니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데이터 및 서버 관리도 문제였습니다. 더 많은 대역망과 서버는 물론 제대로 된 데이터센터도 필요해집니다. 더이상 그들만으로 유튜브 서비스를 감당해 나가기 어려워진 겁니다.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유튜브는 충분히 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튜브의 길을 잡아준 핵심 요소를 다시 짚어봅니다.
1️⃣ 명확한 시장성, 그 이상의 진정성
동영상 공유가 어려운 당시 시장 생태계와 이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대중의 요구를 파악했고 스스로도 체감했습니다. 누구나 쉽고 편하게 동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하자는 사업적 정체성을 가져갈 수 있던 이유입니다.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라는 샛길에서 금세 걸음을 되돌린 힘이기도 하고요.
2️⃣ 적절한 플랫폼과 정체성 설정
사실 기이해보이는 유튜브의 초기 매칭 서비스도 나름 이유는 존재합니다. 2006년 자웨드 카림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핫오어낫을 주목한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용자 스스로 콘텐츠를 업로드하고 이를 대중과 공유하는 플랫폼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고요. 유튜브는 업로드 기술을 발전시킨 게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도록 해서 동영상 유통 문제를 해결했죠. '당신'을 뜻하는 'You'에 텔레비전을 가리키는 'Tube'를 결합해 모두가 시청자이자 제작자이게 하겠다는 'YouTube'라는 이름의 정체성도 그래서 나올 수 있었고요.
3️⃣ 멤버 간의 합
페이팔에서 세 사람이 만나지 않았다면 유튜브는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누가 뭐래도 당시 별도 변환 과정 없이 파일 전송만으로 동영상 공유 가능 플랫폼을 만들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혁신입니다. 그것도 단 세 명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