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그룹 K/DA가 올해 "All Out"이라는 5트랙 EP를 발표했다. 4명의 원조 멤버에다가 이번에는 인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었던 SNS 스타 세라핀이 합류해 인기를 끌고 있다. K/DA의 데뷔곡 "POP/STARS"의 뮤직비디오의 유튜브 조회수는 2020년 12월 20일 기준 4천7백만 회를 돌파했으며, 아이튠즈 K-pop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고, 팝 차트 기준으로 최고 2위까지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은 게임 속 가상 캐릭터로 구성된 팀이라는 것이다.
K/DA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 게임 안에서 존재하는 캐릭터 아리, 아칼리, 카이사, 이블린을 LoL의 개발 및 유통사 라이엇 게임즈가 걸그룹으로 재탄생 시킨 결과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리그 오브 레전드 2018 월드 챔피언십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의 문화인 케이팝을 기념하기 위해 라이엇에서 가상의 케이팝 걸그룹을 선보인 것이다.
K/DA는 설정상 리그 오브 레전드의 평행 세계관에 존재하며, 멤버마다 자신만의 걸출한 배경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리드보컬, 리드댄서, 래퍼 등 한국 아이돌 그룹 특유의 멤버구성을 그대로 옮겨왔다.
이 캐릭터들은 게임 내에서 담당 성우 목소리가 있지만, 앨범 작업에는 '(여자) 아이들'의 미연과 소연, 매디슨 비어(Madison Beer), 자이라 번스(Jaira Burns), 베아 밀러(Bea Miller), 울프타일라(Wolftyla) 등 다양한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가수들은 K/DA의 목소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K/DA의 실제 멤버인 아리, 아칼리, 카이사, 이블린, 그리고 이번 앨범에서 객원 보컬로 참여한 세라핀은 각자의 브랜드 이미지와 팬덤, 그리고 소셜미디어 계정까지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그룹 멤버 아칼리가 미국의 유명 음악 웹사이트 Genius의 유투브 채널에 등장해 K/DA의 노래 가사를 분석하는 때도 있었다.
케이팝에서 가상 가수가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등장한 한국 최초의 사이버 가수 '아담'에서부터 2012년 등장한 최초의 캐릭터 가수 '시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팝 아이돌 하츠네 미쿠(Hatsune Miku)는 보컬로이드 소프트웨어의 대변인으로 시작해 점차 독립적인 음악 아이콘으로 변모했다. 오늘날에도 하츠네 미쿠는 거대한 경기장을 가득채울 정도의 팬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그가 거울에 비친 홀로그램 형태로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특권을 위해 큰 돈을 지불한다. 라이엇 게임즈에서도 LoL 게임 캐릭터로 음악 그룹을 결성해 힙합 그룹 True Damage, 헤비메탈 밴드 Pentakill 등을 선보인 바가 있다.
하지만 게임 내 캐릭터로 프로젝트성 걸그룹을 결성하고, 실제 아티스트들이 이들의 노래를 공연한 것은 국내 최초다. 나아가 리그 오브 레전드 2018 월드 챔피언십 개막식에서 AR(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현장에 마련된 화면에 캐릭터가 등장해 '합동 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차우진 스페이스오디티 음악 평론가는 이와 같은 시도가 엔터테인먼트에 주는 의미에 대한 질문에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가상 아이돌)은 늙지도 않는다. 지치지도 않는다. 유지비도 안 든다. 이런저런 기획이 가능하다 ... 한국의 롤유저와 롤문화, 롤커뮤니티가 일종의 트렌드세터로서 전 세계 유저한테 영향을 주고 있다. 아울러 BTS(방탄소년단)를 통해 외국 유저들이 케이팝에 익숙해지는 이 시점에 게임 회사에는 이런 시도가 의미 있다"
아울러 음악산업은 최근 수익구조가 비욘세와 같은 아티스트의 브랜드 영향력에 의존하는 구조로 바뀌었는데, 브랜드 파워는 오랫동안 정상에서 활동했거나 매우 독특한 컨셉을 가진 케이팝 그룹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롤게임 내의 캐릭터는 이미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브랜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차우진 평론가의 해석이다.
올해 현실의 아이돌 멤버와 가상 세계 아바타가 공존한다는 독특한 콘셉트의 SM엔터테인먼트 신인 걸그룹 '에스파'(aespa)가 데뷔하기도 했다. 현실 멤버들과 아바타가 인공지능 시스템 '나비스'(Navis)의 도움을 받아 '싱크'(Synk)라는 연결 신호를 통해 소통한다는 설정이다.
"가상세계 멤버들이 현실 세계 멤버들과 서로 다른 유기체로서 인공지능(AI) 브레인을 가지고 있어 서로 대화를 하고, 조력도 해주고, 친구가 되어주고, 각자의 세계를 오가는 등 전혀 새로운 개념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일 예정"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에스파의 설정은 다소 낯설지만, 아바타가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온 미래 세계의 일면을 미리 보여주고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아바타 캐릭터도 자체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하는 등 독자적 활동이 어느 정도 가능해 그룹의 활동 반경이 확장되고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팬을 만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아이돌 아바타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에스파에 가요계의 관심이 쏠린 것은 지금까지 SM에서 내놓은 걸그룹이 향후 시장의 트렌트를 선도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7년 SES와 2007년 소녀시대다. 이들은 각각 1세대와 2세대 걸그룹 시대의 막을 올리는 선도적 역할을 했다. SES가 10~20대 남심을 공략하는 본격적인 걸그룹의 시초였다면, 소녀시대는 9인의 멤버로 등장해 다인조 걸그룹의 시대를 열었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는 9월 11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트남 비즈니스 협력 세미나’에서 “저와 SM이 바라보는 미래 세상은 ‘셀러브리티의 세상’ 그리고 ‘로봇의 세상’ 등 크게 두 가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AI와 로봇을 통해 개인화된 된 수많은 아바타가 생겨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초거대 버추얼(virtual) 제국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연예계에선 아바타를 이용한 각종 캐릭터 사업이 더욱 커질 수 있다고 본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아이돌의 아바타를 활용하면 각종 시공간의 제약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다. 심지어 각자 마음에 드는 아이돌 아바타와 자신의 방에서 단둘이 대화하고 맞춤형 공연을 관람하는 것까지 가능하다”며 “그 확장성은 무한대에 가깝다”고 기대했다.
사실 K팝이 한류 붐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아티스트의 활용은 업계에 화두가 됐다. K팝 콘서트가 인기를 누리지만 아티스트들은 한번에 한곳만 갈 수 있으니, 아티스트들 재현한 홀로그램 공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온라인 활동이 많아지는 이 때, 바쁜 스케줄을 대신할 수 있는 K팝 아이돌을 이 아바타로 대체하는 것이다.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다른 질병, 기후 변화 등 인류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격동의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아바타와 가상 캐릭터가 음악계에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트렌드에 주목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