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고대 그리스에서 읽을 수 있다면, 구조적으로 정교화한 형태는 로마 공화정입니다. 도시국가였던 아테네와 달리 제국으로까지 융성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범위도 수준도 다른데요. 과연 어떻게 운영됐길래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물론 과거 근대를 여는 르네상스의 롤모델로 여겨졌을까요?
공화정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1화에서 살핀 바 있습니다. 왕 개인이 아닌 공동에 의한 의사결정 방식을 취하는 정치입니다. 오늘날 체제 구분의 편의상 ‘왕이 없으면 공화제’라는 식으로 구분하지만, 중요한 것은 꼭 ‘왕’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왕 포함 누구에 의해서도 의사결정이 독점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난 2화에서 언급한 바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체제에 대한 결론과도 비슷합니다. 1인(왕)이든 소수(귀족)든 다수(인민)든 누구에 의해서든 정치적 의사결정이 독점되면 문제 있다고 보고 상황에 따라 유연한 정체(政體)를 이상적으로 봤죠. 공화국(republic)의 이념 또한 비슷합니다. 국가를 이루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국가, 공공의 것(res publica)으로서의 국가를 가리키죠. 고대 로마는 이의 원형으로 꼽힙니다.
로마가 처음부터 공화국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753년 건국된 로마는 약 200년 동안 왕정을 지속합니다. 그러다 정복 활동의 실패로 국력이 침체되자 귀족들의 합의체인 원로원 세력이 왕정을 몰락시키는데요. 이때부터 로마 공화정이 시작됩니다.
로마 공화정은 누가 전적으로 통치를 좌지우지하지도 않고 누구나 국가 운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세 계급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뤘죠. 귀족과 평민, 그리고 정무관이라는 이름의 통치계급입니다. 정무관 중에는 다시 집정관이라는 최고 통치권자가 시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됩니다. 상호견제 및 대내외 역할 분담을 위해 2명을 두었으며, 독재를 막기 위해 임기도 1년으로 매우 짧습니다.
사실 로마 공화정은 원로원 세력에 의해 시작된 만큼 귀족의 입김이 세고 자칫 과두정으로 흐를 여지가 컸습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의 평민들은 자치와 자유에 대해 열정적으로 투쟁했습니다. 스스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나서는 한편 적극적으로 귀족들과 다툼을 벌이기도 했죠. 내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전쟁에서 철수하는 모습도 보여주고요.
결국 귀족들은 모든 것을 잃지 않기 위해 평민에게 일정 몫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평화의 대가로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권리를 부여하고, 평민의회는 공식 지위를 얻고 관료 선출에 대한 권리도 얻죠. 이들이 바로 평민들을 대표하고 법률 사건에 개입했던 호민관입니다. 또한 암묵적으로 원로원 귀족 출신에서 2명의 집정관이 추려지던 것에서 1명은 반드시 평민일 것을 법률로 규정하는 균형을 이루는 데도 성공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공화적 개혁 조치를 통해 이룬 내부 통합과 정치적 성장은 로마가 이탈리아 지역을 정복하고 나아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는 발판이 되죠.
정리하면 로마 공화정은 다음 3 세력에 의해 운영되고 또 서로 견제되며 균형을 이뤘습니다.
로마 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이 서로 세력 균형을 이룬 가운데 집정관으로 하여금 정치를 담당하도록 한 일종의 대의제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대표자의 독단과 전횡을 막기 위해 상호견제와 권력분립이 철저하다는 점입니다. 통치를 담당하도록 선출되는 정무관 계급의 통치는 법에 따르는 법치이며, 민회와 호민관의 견제를 받고 국가 중대 사항은 귀족 모임인 원로원의 자문과 재가를 구해야 하죠. 더구나 고위직에 대해 원로원이나 민회의 탄핵 제도도 보장했습니다. 이런 구조 아래서 로마는 그야말로 공공의 나라, ‘공화국’일 수 있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로마 공화국의 융성과 유지는 로마 국민의 당시 뛰어난 시민적 덕성으로 발휘됐다는 점입니다. 흔히 백성이나 일반 대중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인민, 국민, 시민과 같은 다양한 표현이 쓰이는데요. 이 중 시민은 정말 시(市)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적 구성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당대 로마는 평민층도 정치적 권리를 수호하고자 적극적으로 나섰을 뿐 아니라 귀족들도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걸맞은 책무를 다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전쟁이 나도 병사들을 이끌고 똑같이 종군했습니다. 한 예로 16년 동안 카르타고와 지중해 패권을 다퉜던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전장에 나선 집정관의 수는 25명이었으며, 그중 13명은 전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후에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사상가이자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1469~1527)는 로마 공화국을 분석합니다. 근대를 연 르네상스가 그리스 로마 시대를 모델로 한 문예 부흥 운동이기도 하다는 점 잘 아실 겁니다. <군주론>의 저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군주주의자로 유명한 마키아벨리지만, 그는 사실 공화주의자입니다. <군주론>은 당대 체제 안에서 가능한 정치론을 펼친 것에 가까우며, 중세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신의 후광을 벗겨낸 군주정의 민낯을 보여준 작업이기도 하죠. 군주정의 최선은 덕이 아닌 권모술수라는 거죠.
돌아와서, <로마사 논고>라는 저작을 남기기도 한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에 관심 가진 이유도 당시 조국 이탈리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섭니다. 정치적 부패 속에서 도시 단위로 여러 자치 공화국이 들어서고 있었으나 주변엔 프랑스나 에스파냐 같은 위협적인 왕국이 즐비했죠. 마키아벨리는 궁금합니다. ‘로마는 공화국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강대했지?’
앞서 로마 공화정의 2가지 핵심으로 돌아봤던 내용이 그대로 귀결됩니다. 먼저 정치 형태입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에서 바람직한 정치 제도와 행위의 영원한 모델을 읽어낼 수 있다고 봤습니다. 중요 국가사업은 원로원의 재가를 받고, 평민의 대표 호민관은 결정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민회를 통해 입법권도 가졌죠. 이를 바탕으로 집정관은 집행권을 수행합니다. 그야말로 군주정, 귀족정, 민중의 요소들이 교묘히 분배돼 조합된 형태입니다. 이러한 권력분립 및 상호견제의 구조는 오늘날 법원의 사법권을 제외하면 거의 유사합니다. 게다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법이 발달해 관습법, 성문법 그리고 모든 이에게 적용하는 시민법까지 제정하죠.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로마법대전)으로 편찬돼 이후 서양법의 기본이 되죠.
나머지 하나의 힘은 로마의 건강한 시민성에 있었습니다. 보통 영토를 엄청나게 넓힌 ‘제국’ 시절을 로마의 전성기로 보지만, 실은 그 기틀을 닦은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안정된 것은 이전 공화국 시절입니다. 평민과 원로원이 대립해 서로 견제하던 공화정이 로마를 자유로우면서 강력하게 만든 것이죠.
그러나 이후 로마가 강성해져 외적의 위협이 줄어들자 내부 분열이 극심해집니다. 귀족들은 더이상 용기나 헌신을 보여주지 않고 세력 다툼에 매몰되고, 평민들은 그들이 던져주는 콩고물을 챙깁니다.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공화정을 세웠던 옛날과 다른 모습이 되죠. 카이사르에 의해 내전이 종식되고 그의 독재를 막고자 암살을 기도한 뒤에도 공화정은 회복되지 못합니다. 이미 권력의 적용 범위나 임기 등 제도에 균열이 일어나고 권력은 특정 개인 또는 집단에 집중되기 시작했죠.
결국 내전과 혼란을 최종적으로 수습한 것이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존엄한 자(Augustus)라는 칭호를 내리며 사실상 공화정의 종식을 알리죠. 결국 로마의 경우 타락하고야 말았지만, 건강한 시민의식은 자유의 획득은 물론 유지에도 필수적인 셈입니다.
로마 공화국이 이후 정치 역사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로마 공화정의 정치적 면모를 분석하자면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의 과도기적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에서 어느 정도 권력의 분립이 이뤄졌으며, 법이나 제도를 통해 상호견제의 원리를 뒷받침했죠. 나아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조화롭게 운영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원리라든지 이상적 공동체 구현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적 뼈대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로마의 자치 공동체적 면모는 중세 도시의 전형인 코뮌(Commune)으로 계승됩니다. 코뮌은 중세 자치도시로서 중앙 권력을 대신해 중세 교회와 도시 주민들의 자치 권력이 결탁해 독립 도시로서 번영하는 형태죠. 터전적 후손인 이탈리아에선 12세기부터 집정관을 임명하는 도시들이 생겨나고 공화국을 자처했습니다. 이후 프랑스혁명을 대표로 한 시민혁명들의 영감도 로마 공화정입니다. 오늘날 미국 상원(Senate)이란 명칭의 어원도 로마 원로원이죠.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는 중세 신 중심 질서 아래 약 1000년의 공백을 갖고서야 근대 이후 다시 등장하는 셈인데요. 이에 관해선 다음 화에 이어서 짚어봅니다.
도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고대편>, 구민정·권재연 엮음, 휴머니스트, 2011.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근현대편>, 구민정·권재연 엮음, 휴머니스트, 2011.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시공사, 2012.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7: 민주주의와 독재>, 크리스티안 마이어 외 6명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2명 엮음, 나인호 옮김, 푸른역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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