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초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이다.
유수(幽囚)란 '잡아 가둠'을 뜻한다. 과거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끌려간 바빌론 유수에 빗대 붙인 이름으로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불린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 동안 로마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에 뒀으며, 프랑스 왕이 교황을 선출했다. 7대에 걸쳐 교황은 프랑스 왕의 말에 복종했으며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돌아가며 사건은 종식된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 후 교황권은 떨어지고 왕권은 강화됐다. 왕의 지원에 따라 상공업이 발달해 국가 재정이 풍족해지고, 상인 층은 왕이 관료제와 군대 육성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세력 확장에 매진하던 강력한 군주였다. 군비를 확충하고 교회를 압박할 의도로 이전까지 하지 않던 교회에 대한 과세를 시도한다.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는 강하게 반발하지만,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통해 교황을 비난하는 한편 병력을 파견해 교황을 '아나니'라는 변방으로 납치(아나니 사건)한다. 결국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보나파키우스 8세는 심한 모욕을 겪은 끝에 사망한다.
교황권이 크게 약화한 상징적 사건이다. 아비뇽 유수로 인해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이 정통성을 두고 대립하며 교회는 대분열 시대를 맞고 권위를 실추한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자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을 폐위하고 단일 교황을 내세우지만, 교회 개혁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끊이지 않아 이후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