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에선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과 체제가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얻기 시작했는지 살펴봤습니다. 이전 사회와 대비되는 자본주의의 특징은 상품 거래로 발생하는 이윤 추구에 기반한 경제 시스템인데요. 과거 경제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이윤의 추구는 정치·윤리적으로 장려되지 않았고 따라서 상공업의 위상도 높지 않았죠. 지난 화에서 이를 전환하는 자본주의적 의식의 뿌리를 들여다봤다면, 이어서 당시 유럽의 역사적 배경과 이해관계를 짚어봅니다.
사회적으로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기를 특정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상업이 본격적으로 떠올랐다는 의미에서 흔히 '중상주의'로 일컫는 16세기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18세기 이후입니다.
위 두 시기로 특정하는 이유가 다른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을 투자하고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자본가)의 모습이 등장한 때를 자본주의의 시작으로 본다면 16세기 중상주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흐름이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술혁신, 대량생산에 힘입어 시대의 지배적 생산양식이 된 때로 잡으면 18세기 후반으로 보는 거죠. 다시 말해 16세기에 태동한 자본주의적 '양식'은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체제'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봉건제 및 농촌 경제의 몰락 + 중상주의와 함께 상업 경제 부상 = 자본주의 전환의 유인
16세기 유럽에서 상업 자본주의가 태동한 배경은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자본주의를 흔히 '상업' 자본주의로 부르는 이유는 자본을 투자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말 그대로 상업에 치중됐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나 공장 생산 체제와 같은 상품 생산보다 유통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했죠. 상품 생산 경제는 자본주의의 핵심이기에 이 시기 자본주의를 불완전하다고 보는 이유기도 합니다.
중세까지의 주요 문명사회를 구축하는 정치적 근간은 봉건제도입니다. 왕의 입김이 닿기 힘든 지방은 영주가 다스립니다. 봉건사회는 다시 장원(莊園)으로 운영됩니다. 영주는 토지를 소유하고, 영지에 귀속된 농노의 경작을 통해 자급자족 경제 단위를 구성하죠.
그런데 14세기부터 위기가 닥칩니다. 먼저 기근입니다. 14세기 중세에선 자연재해로 인한 기근이 잦았습니다. 1315~1317년(길게는 1322년) 영국에 닥친 기근은 큰 인명 피해를 내 '대기근'으로도 불리죠. 여기에 흑사병(1348~1350)이 찾아옵니다. 인구와 농업 생산물이 대폭 감소합니다. 그런데 영주들은 영지를 확장하고 농노에게 더 많은 공물을 요구함으로써 수입을 늘리려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입니다. 말 그대로 공유지나 소유 개념이 모호한 땅에 영주가 울타리를 치고 자산으로 삼은 건데요. 여기에 당시 도시의 성장으로 수요가 높던 양모(의복)를 확보하기 위해 농경지가 아닌 목초지를 운영합니다. 농업의 성격에 있어서도 생계유지가 아닌 상품성이 들어선 거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농민들의 저항은 극심해지고 장원을 이탈하거나 유랑하기에 이릅니다. 농촌을 떠난 농민들은 임금 노동자가 되고, 봉건적인 장원제 및 농촌 경제는 몰락합니다.
이제 상업이 어떻게 떠올랐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16세기 유럽은 르네상스를 통해 철학, 예술, 과학, 기술, 항해술 등 찬란한 융성을 이뤘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정도로 종교의 권위는 낮아졌고 봉건제는 쇠퇴했으며 왕권은 강화됐습니다. 다양한 정복 사업을 벌일 정도로 왕의 힘이 강력해 절대왕정 시기도 부르죠.
하지만 힘도 먹어야 씁니다. 당시 절대왕정 역시 왕권 유지와 영토 팽창, 전쟁에 막대한 재정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기에 자금을 지원한 것이 상인 계층입니다. 절대왕정은 어느 한 국가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경쟁 구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자국 상인의 이윤은 국가의 부를 늘린다고 보고 적극 지원했죠. 적극적인 신항로 개척이나 식민 지배, 교역 등도 국부를 증진시키는 행위로 힘껏 수행됐습니다.
16세기 이후 유럽 중상주의적 움직임: ① 자국 보호 무역 ② 식민지 확보를 통한 국제 무역
처음으로 국제적 기업 형태인 무역 상사도 등장합니다. 대항해 시대에 영국을 필두로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세운 동인도 회사가 대표적이죠.
'무역'이라는 형태에서 읽을 수 있듯 생산이 아닌 상업과 유통에 집중됐으며, 이때 벌어들인 부는 이후 산업 자본주의를 여는 자본이 됩니다. 때문에 마르크스는 유럽의 중상주의 시기를 두고 "원시적인 자본주의 축적 과정"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 어떻게 자본주의가 결합했는지에 관해선 자본주의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그중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의 해석을 빌리면 당대 일어난 경제적 가치의 서열 전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폴 스위지에 따르면 중세 봉건사회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지배하던 사회입니다. 쉽게 말해 생산은 사용을 위한 활동(자급자족)이지 교환(상업)을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경제학자 로버트 브레너는 당시 중세 시장에 나온 상품은 잉여(surplus)였다고 얘기합니다. 장원을 통한 자급자족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토지 소유주인 영주들이 생산방법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농노에 대한 지배력 확대로 수입을 도모한 이유기도 합니다.
두 얘기를 종합해 환기하려는 것은 자본주의가 중세 사회에 가져온 두 가지 혁신입니다. 경제 체계와 생산 방식의 변화입니다. 먼저 얘기할 것은 경제 체계의 변화입니다. 상업과 교역의 발달, 국가적 지원에 따라 중세의 생산 체계는 기존 농업 중심의 농촌과 상업 중심의 도시가 양립하는 상태에 놓입니다. 생산 체계의 신구(新舊)가 비교 대상에 오르고, 장원이라는 봉건적 생산 조직의 비효율성이 드러납니다. 직접 만드는 것보다 도시의 물건을 사는 게 쌀뿐더러 전통적인 농노 노동 역시 유연한 고용 노동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졌죠. 경제 체계는 보다 효율적인 도시(시장) 중심으로 옮겨갑니다.
다음으로 생산 방식의 변화입니다. 기존 봉건사회에선 생산 기술이나 조직에 대해 혁신을 조장할 만한 유인이 없습니다. 생산한 물건은 자급자족에 따라 사용하고 그 외엔 공물이나 부역으로 제공합니다. 혁신이 이윤으로 돌아올 정치적·경제적 구조가 부재합니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하던 대로 하면 될 뿐 크게 개선해야 할 압력도 니즈도 없죠. 보상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상업의 발달로 이전에 없던 교환 생산 체계가 창출되자 변화와 가능성을 맞닥뜨립니다.
이를 도식화해 정리하면 위와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대표적인 생산 요소(factors of production)는 노동력, 토지, 자본입니다. 오늘날엔 여기에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추가되는데요.
노동력, 토지, 자본은 존재는 하되 판매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성을 갖지 못했죠. 산업혁명 이후 시장 자본주의가 자리 잡으며 생산 요소로서 거래되기 시작합니다. 노동력은 부역에 따라 의무적으로 제공하거나 동원되는 것이지 대가를 지불하는 게 아니었고, 토지는 관료나 귀족에게 지급되는 행정 또는 군사 단위였습니다. 자본 역시 귀중품(귀금속)이거나 생산을 위한 도구(장비)일 뿐이었죠.
정치적으로 통제됐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았기에 생산 요소 역시 용도와 가능성에 제한을 받은 것이죠. 마치 기업가 정신이 과거로썬 상상도 하기 힘든 '생산 요소'인 것처럼요.
자본주의 및 근대화 이전 사회에선 수 세대 혹은 수 세기가 지나도 도구나 체제가 변화하지 않곤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나 중세 르네상스 시대나 씨 뿌리고 밭 가는 모습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요. 그러나 자본주의를 통한 이윤 추구의 보장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추동하고 나아가 사회적 혁신의 문을 열어젖히게 됩니다.
도서
<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레스터 서로 지음, 조윤수 옮김, 부키, 2009.
<불안한 승리>, 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뿌라와이파리. 2020.
<세계화와 변화하는 자본주의>, 황준성·강달원 지음, 시그마프레스, 2011.
<역사와 쟁점으로 읽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교육연구회 엮음, 시그마프레스, 2019.
<역사의 비교>, 김대륜 지음, 돌베개.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