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를 주제로 한 이즘 스튜디오 마지막 화를 맞아 앞으로의 자본주의를 전망합니다. 자본주의는 현재 어떤 과제를 맞닥뜨리고 있으며, 이에 대해 국내외 정·재계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그리고 ‘ESG’를 통해 살펴봅니다. 현실적 적용에 어려움은 없는지도 짚어 봅니다.
현 신자유주의 체제 자본주의가 맞닥뜨린 과제는 지속가능성의 위협입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자본 축적이 낳는 양극화와 성장 과정에서 시장 외부효과로 간과된 환경오염입니다.
자본 축적의 욕망은 자본주의의 힘입니다. 이 욕망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했으며, 체제까지 바꿔놨습니다. 인류 단위로 볼 때 부의 양은 늘었습니다. 그러나 성장은 유력 자본가 및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수혜 역시 편중돼 빈부격차 및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다시 대물림돼 국가, 개인할 것 없이 양극화와 사회문제를 존속시킵니다.
문제는 소득 분배만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세계의 위협은 자연환경에 가해진 충격에서도 드러납니다. 지난 화에서 소개한 시장 외부효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표현했듯,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 ‘가격’에 따라 운영됩니다. 그러나 가격은 ‘시장가치’만을 설명합니다. 외부효과로 발생하는 비용은 포함되지 않죠.
결국 실제 시장가격으로 지불하는 비용과 사회적 책임으로 돌아오는 비용의 간극은 막대함에도 지불되지 않거나 심지어 경고되지 않죠. 이러한 문제의식은 전통적인 자본 축적 과정을 돌이켜 봄으로써도 확장해 볼 수 있습니다.
경제 성장에는 화폐자본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연자본, 정치자본, 사회자본과 같은 비화폐 자본이 경제자본으로 전환될 것을 요구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 경제 성장은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환경, 제도, 권리, 사회적 네트워크 등 시장지표로 잡히지 않는 또 다른 자본을 사용함으로써 얻은 결과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5화에서 짚었듯 2009년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 조셉 스티글리츠 등의 학자들이 그간 국내총생산(GDP)로 대표되는 경제지표에 ‘환경’ ‘규제 완화’ ‘소득 분배’ ‘삶의 질 평가’와 같은 요소를 고려한 보고서를 발표한 겁니다. 탄소세 부과나 탄소 배출권 거래에 관한 움직임 등도 시장 외부효과 및 자연자본에 대해 가격을 매기고 시장 안으로 끌어들인 사고고요. 그간 시장과 분리했던 사회적 가치를 포함하는 게 경제 성과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경제에도 이롭다는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셈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은 이미 세계 차원에서 논의 중입니다. 예로 들 것은 2020년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입니다. 다보스포럼은 매년 1월 정치·경제 부문 인사 및 학자들이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주요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지난해 주제는 ‘상호협력하며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 for a Cohesive and Sustainable World)입니다. 소득 불평등, 사회 분열, 기후변화 등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 전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대안으로 기업 경영의 목적을 기존 주주 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전환할 것을 제시했습니다. 주주 중심의 기업 경영을 지양하고, 기업과 연관된 경우는 물론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모든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선언했죠. 자본주의의 개념과 방향에 변화를 주기로 천명한 셈입니다.
그럼 주주 자본주의가 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4화에서 짚었듯 ‘자본주의’ 앞에 붙는 명명은 해당 자본주의 체제를 이끄는 핵심입니다. 주주 자본주의는 대규모 자본을 조달하기 위한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가 등장하고, 은행이나 투자자 같은 금융자본가가 결합해 등장한 형태입니다. 기업의 소유주와 전문경영인(CEO)이 나뉘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소유주는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자한 투자자, 즉 주주죠.
주주 자본주의의 핵심은 주주 가치의 극대화입니다. 경영인의 유일한 의무라고도 표현됩니다. 신자유주의 진영의 핵심 학자인 밀턴 프리드먼과 그의 동료 학자인 시카고학파에 따르면 경영인은 투자자의 대리인입니다. 그러므로 투자자의 자금을 오용하지 않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쓸 의무가 있습니다. 투자자들이 바라는 건 명확합니다. 돈 많이 버는 거죠. 경영인의 보수가 주주 가치와 연동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주주 가치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 주주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입증했습니다. 기술 발전, 세계화로 인한 자유 시장의 확대 등도 원인으로 꼽힙니다. 생각해 볼 점은 있습니다. 주주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떠오른 것은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및 정부 실패,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거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때입니다.
성장 동력으로 삼은 것은 대기업입니다. GDP는 올랐습니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의 결실 대부분은 소득 상위층에 돌아갔습니다. 투자는커녕 자본도 없는 일반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변화를 겪지 않았고요. 지구 온난화, 해양 오염, 생물종 멸종 등 헤아리기 힘든 환경 비용은 대체로 무시됐습니다. 주주 이익과는 상관없으니까요.
그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기업 경영의 방점을 주주 이익이 아니라 어디에 찍자는 걸까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떠오른 것은 지난해 다보스포럼보다 이전입니다. 2019년 8월 미국 200대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에서 기업 목적에 관한 성명으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이해관계자란 고객, 근로자, 거래기업, 지역사회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입니다. BRT의 선언은 그간 사회적 책임에 소홀했음을 인정하고, 기업의 목적을 주주 가치 제고에서 이해관계자 니즈 만족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겠다.
근로자에게 투자하겠다.
거래기업을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대우하겠다.
지역사회를 지원하겠다.
주주를 위해 장기적 가치를 창출하겠다.
— 2019년 8월 BRT에서 내건 기업의 5가지 책무(commitment)
이러한 선언에 181개 대기업 최고경영인들이 서명합니다. 주주 가치가 빠지진 않았지만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습니다. 언론이 화들짝 놀랍니다. ‘주주 자본주의는 끝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시작됐다’며 플래시 라이트를 터뜨립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해프닝에 그쳤습니다. 이후 선언 내용을 이사회에 보고한 기업은 1곳에 그쳤던 거죠. ‘착한 기업’이라는 마케팅 효과만 소비한 셈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에서 자본주의 전환은 어떤 식으로든 가시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업은 근로자, 지역사회, 국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 대선 공약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일어난 2008년 금융위기는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는 시위로 번진 바 있죠. 신자유주의(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은 뿌리가 깊습니다. 영화 <빅쇼트>로 다뤄지기도 했고요.
결론부터 말해 현시점에서 당장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하거나 주주 자본주의를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먼저 현재 이해관계자의 개념이 두루뭉술하다는 점입니다. 고객, 노동자, 협력사, 지역사회 등으로 대상의 윤곽은 그려졌으나 확정적이지 않고, 그 범위나 우선순위도 모호해 이론이나 실무적 체계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이는 기업의 의사 결정에도 혼선으로 작용합니다. 주주 자본주의에선 이해관계가 충돌해도 주주가 지분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경영에 중시할 목표와 방법을 명확히 합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경우 이해관계자 사이 우선순위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경영인의 자의적 선택으로 흐르고 주주의 이익을 해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해관계자의 니즈가 우선시돼도, 아예 주주 가치를 외면하는 일은 기업 경영과 생존에 있어 그리기 힘듭니다.
두 번째 난점은 현재 기업 경영을 관장하는 제도가 주주 자본주의에 맞춰져 있다는 점입니다. 주주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해관계자의 니즈를 반영하긴 어렵습니다. 오늘날 경영인의 평가나 보수는 주주 가치에 기반합니다. 이는 곧 기업의 재무적 성과, 즉 재무제표가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들은 모두 재무제표에 잡히지 않는 비재무적 성과입니다. 비재무적 성과 때문에 재무적 성과를 도외시하는 경영인은 이사회에 의해 해고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더라도요.
결국 경영인은 물론 이사회를 동반한 기업의 경영 철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주 가치 이상으로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포함해야 하죠. 그러려면 이사회의 성격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이사회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씨앗들은 이미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에 투자하는 임팩트 투자라든지, 노동조합에서 이사를 선임하는 노동이사제가 부분적이지만 찾아볼 수 있는 예입니다. 기업이 목표한 매출의 초과액이나 사전 약정에 따라 이익 일부를 협력사에 나눠주는 이익공유제 역시 협력사라는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제도고요.
측정하지 않으면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 —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
마지막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경제지표의 변화입니다. 나라 단위로 전통적 자본주의의 성장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게 GDP라면, 기업의 성과를 드러내는 건 재무제표입니다.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경영을 위해선 이를 측정하고 반영할 수 있도록 공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경영인도 안 잘릴 수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다보스포럼을 비롯해 글로벌 공시표준 기관, 회계법인들도 이해관계자 존중 경영을 재무제표에 반영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자본주의 모델로 보다 선명히 그려볼 수 있는 게 이미 있습니다. 바로 ESG 경영입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비교해 좀 더 실천 가능한 소프트웨어 느낌이랄까요. 다소 모호한 이해관계자의 범위에 대해서도 환경(E), 사회(S), 지배구조(G)로 더 구체화돼 있으며 주주 가치를 배제하지도 않죠.
애초에 ESG는 투자 원칙으로 등장한 개념입니다. 2006년 UN이 제정한 ‘책임투자 원칙’(PUI)에서 나온 것으로, 기업에 대한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ESG를 중시하도록 기준을 제시했죠. 현재 세계 최대 규모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을 비롯해 주요 기관투자가들은 기업 가치 평가에 ESG를 핵심 기준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무적 성과가 아닌 ESG와 같은 비재무적 요소도 기업 가치로 인정받기 시작한 거죠. 아직 그 점수와 기준에 객관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지만, ESG 평가에 좋은 점수를 받아 놓으면 주가도 오릅니다.
사회적 호응도 힘을 실어줍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제사회 전체가 기후 위기, 사회 양극화 등 환경 및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죠. 애초에 거론되던 그린 뉴딜이 더욱 각광을 받는 등 자금도 녹색 산업에 몰리고 있고요. 게다가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 경제주체가 되기 시작한 MZ세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름 아닌 환경, 사회, 공정입니다.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는데 돈까지 몰립니다. 앞으로의 자본주의를 당장 뽑아야 한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연 ‘ESG 자본주의’입니다.
도서
<경제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레스티 서로 지음, 조윤수 옮김, 부키, 2009.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리처드 로빈스 지음, 김병순 옮김, 돌베개, 2014.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최남수 지음, 새빛, 2021.
<자본주의 고쳐쓰기>, 세바스티안 둘리엔 외 2명 지음, 홍기빈 옮김, 한겨레출판, 2012.
<자본주의 대전환>, 리베카 헨더슨 지음, 임상훈 옮김, 어크로스, 2021.
<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버트 L. 하일브로너·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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