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여러 화에 걸쳐 자본주의의 주요 흐름과 특징을 짚어봤습니다. 역사적으로 부수적 역할을 수행하던 시장경제는 상업과 유통 발달에 힘입어 사회 주요 영역으로 부상했습니다. 산업혁명을 맞아 생산 영역을 포함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고, 자유방임주의에 따라 그 몸집과 경쟁 양상이 커졌습니다. 이에 독과점 및 생산과잉의 문제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수정 자본주의라는 메스를 꺼내 들었죠. 이번 화에선 다시 정부 실패를 지적하며 시장 주도 경제 질서를 주창한 신자유주의와 함께, 양극화와 환경 문제로 또다시 변곡점을 맞은 오늘날 자본주의를 짚어봅니다.
신자유주의는 정부 불신과 시장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수정 자본주의 아래 커졌던 정부 역할을 최소화하고, 다시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추구함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하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며 정부의 시장 개입이 오히려 비효율을 초래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경기 불황과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오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합니다. 정부가 수요를 제공해 경기를 잡을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수정 자본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상황인 거죠. 이에 민간 중심으로 자유 경제 활동을 옹호하는 이론이 지지를 받게 됩니다.
그럼 왜 정부 실패가 발생한 걸까요? 이에 대해선 신자유주의 진영의 대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의 분석을 빌릴 수 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이 투자됐고, 너무 많이 써서 공황이 왔다'고 표현합니다. 통화가 무분별하게 팽창해 수요 과잉이 왔다는 거죠.
정부의 잘못된 경제계획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그의 해법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장의 조정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부는 시장 경제에 있어 무능하다는 지적입니다. 너무 많이 개입하면 정부가 관여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경제는 비능률적으로 돌아갑니다. 시장성 없는 사업이 늘어나거나 경쟁력 없는 기업까지 살려내 자원 배분 및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거죠.
계획 경제의 한계도 지적합니다. 아무리 똑똑한 정부나 계획자라도 스스로 자기가 속한 사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경제에 있어 완벽한 계획을 내놓을 수 없으며, 기반이 되는 정보나 지식 역시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이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과 같은 대규모 중앙계획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 심화에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을 대변하기도 하고요. 정부의 계획이나 관료가 시장 경제나 시장 참여자에 비교해 매우 수동적이라는 점도 한계입니다.
하이에크 및 밀턴 프리드먼(1912~2006)에 의해 주창된 신자유주의적 해법은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에 의해 수용됩니다. 다시 국가의 개입을 배제하고, 시장 가격에 생산과 소비를 맡기는 자유 방임 체제로 노선을 변화하죠. 이에 미국과 영국에서 나타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적용을 각각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으로 부릅니다.
경제에 있어 국가 및 정부 활동 영역을 축소하고 민간(자유 시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게 핵심입니다. 정부의 역할은 법률 집행이나 공공재 생산 등에 국한돼야 한다고 보죠.
신자유주의는 승리했습니다. 1980~1990년대 소비에트 진영이 무너지며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화가 이뤄졌습니다. 자본주의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가장 이상적 체제임이 증명된 셈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지닌 본질적 문제는 남았고 심화됐습니다.
경제 발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는 아닙니다. 어느 국가나 사회의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모든 구성원의 행복을 보장하는 지표로 볼 순 없습니다.
남은 문제는 불평등입니다. 그 격차는 양극화로 심화됐습니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공무원이나 정규직과 같은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인건비가 싼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이 늘어났습니다. 경제는 성장해도 중산층의 소득 증가율은 이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중소기업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기업 납품 단가를 맞추기 위해 비정규직 등 안 좋은 일자리를 선호하기 쉽습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자유무역체제는 세계화를 이뤘습니다. 불평등의 단위는 개인, 집단, 사회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됐죠.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의 입증과 문제의 상존은 시대의 고민거립니다. 대중적 감정이 양가적인 이유기도 하죠. 누구도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무언갈 떠올리기 힘들어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하길 바라지도 않죠.
여기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불거진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세계로 퍼지면서, 양극화 문제뿐 아니라 현 시장 경제 체제가 올바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대두합니다. 새로운 자본주의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 4.0은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나톨 칼레츠키가 2010년 저서 <자본주의 4.0>에서 사용한 개념입니다. 그는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를 '자본주의 1.0' '자본주의 2.0' '자본주의 3.0'으로 구분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청사진을 자본주의 4.0으로 제시했죠. 마치 소프트웨어의 버전을 표기하듯 큰 변화에 따라 소수점 앞 숫자로 구분했습니다.
당장 적용 가능하거나 굉장히 혁신적인 방안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자본주의를 정리하고 현시대 상황 속에서 필요한 앞으로의 자본주의를 그려본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문제적으로 진단한 현시대 상황은 '지속 가능성'의 위협입니다.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것은 경제 발전과 맞바꾼 양극화와 환경 오염입니다.
주요 메시지는 정부와 시장이 소통하고 협력하는 포용 성장입니다. 정부와 시장 둘 다 실패할 수 있고, 앞으론 둘 다 필요하다는 거죠. 시장 기능을 존중해 성공한 사람의 더 큰 성공을 밀어주는 한편, 낙오자를 견인하는 사회적 책임도 강조합니다.
경제적으로는 '적응성 혼합경제'를 추구합니다. 일반 경쟁시장과 '효율성'에 제한을 둘 소수 통제시장을 신중히 혼합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제도나 규제, 경제 원칙들을 유연히 변화시킬 수 있는 적응성을 갖춰야 한다는 거죠. 규제를 세심하게 조정하고 민간과 공공 부문의 경계를 지금보다 유연하게 가져가는 것이 방법론 중 하나입니다.
거시경제나 금융규제를 관리하는 정부 역할은 키우고, 정부규모나 재정은 줄여야 한다는 것도 주요 주장입니다. 전자는 역사적 금융위기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며 후자는 시장 경제를 존중하기 위함입니다. 세부적인 방법론은 정부와 민간기업이 열린 마음으로 논의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아쉬운 결론인데요.
그러나 칼레츠키의 저작과 자본주의 4.0이 보여주는 의미 있는 통찰은 정부나 시장 역할 외에도 있습니다. 그간 자본주의 시각으로 포섭하지 않았던 '사회적 가치'를 시장 영역에서 사고하는 진전을 보여줬다는 건데요.
성과 중심의 현재 세계에서는 우리가 측정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측정법을 적용한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예컨대 GDP 증가)이 실제로는 삶의 질을 악화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는 실제로는 생산과 환경보호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성과를 더 정확하게 측정하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이 경제에도 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 <자본주의 4.0> 415쪽.
앞으로의 자본주의, 즉 4.0의 세계에선 사회적 가치 또한 경제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겁니다. 칼레츠키가 저서에서 인용한 윗부분은 2009년 가을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으로 아마르티아 센, 장 폴 피투시와 함께 자리한 조셉 스티글리츠의 발언 일부입니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이 3명은 경제성과를 측정하는 좀 더 포괄적이면서 이전과 다른 방법에 대해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여기에는 '환경' '규제 완화' '소득 분배' '삶의 질 평가'와 같은 요소들이 고려됐죠.
칼레츠키는 이와 같은 요소의 반영은 물론 관련 신기술 및 산업, 세금이나 탄소 배출권 거래 등 실질적으로 시장 인센티브를 적용하는 움직임이 새로운 시장-정부 역할을 통해 출현할 것을 역설하죠. 뿐만 아니라 깨끗한 환경이나 양질의 교육 등 사회적 가치에도 시장 가격을 고려하는 노력이 높은 경제적 효과를 낳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 일명 다보스포럼은 기존의 이익 및 성장 중심의 '주주 자본주의'에서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참여자를 고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로 자본주의의 개념과 방향을 변화할 것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기업 경영에 환경, 사회 영향, 의사결정 및 지배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ESG와도 맞물립니다. 물론 자본주의 4.0과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ESG를 하나로 이해할 순 없으며 각기 적용 방향 및 얼마나 '포스트 신자유주의'를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세부 논의가 필요합니다. 이에 관해선 다다음 주 발행될 마지막 자본주의 리포트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서
<세계화와 변화하는 자본주의>, 황준성·강달원 지음, 시그마프레스, 2011.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최남수 지음, 새빛, 2021.
<자본주의 대전환>, 리베카 헨더슨 지음, 임상훈 옮김, 어크로스, 2021.
<자본주의 4.0 로드맵>, 김덕한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2.
<자본주의 4.0>, 아나톨 칼레츠키 지음, 위선주 옮김, 컬처앤스토리, 2011.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EBS 자본주의 제작팀 지음, 가나출판사, 2013.
뉴스
매일경제
문화일보
연합뉴스
스태그플레이션 초래했던 '에너지 무기화'…50년 만에 재현되나
이코노믹리뷰
[주태산 서평]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낙수효과 복원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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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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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경제